한의학의 성전이라 불리는 『동의보감(東醫寶鑑)』을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 위대한 지식의 총합에 집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 책을 만든 사람, 허준은 과연 그 방대한 기록 속에 누구를 떠올리며 붓을 들었을까?”
허준(許浚, 1539~1615). 그는 단순한 의관이 아니었다. 백성의 고통에 귀 기울인 의사였고, 병자들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은 실천가였다. 오늘 이 글에서는 그가 남긴 수많은 처방들 중 일부에 얽힌 ‘사람 냄새 나는 뒷이야기’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우리가 잊고 있던 ‘의학의 진심’, 그 인간적인 흔적을 되새기는 여정이다.

1. 그의 의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허준은 평민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군관으로 활동했지만 정실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양반으로서의 혜택은 누리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의관이라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조선이라는 신분 사회 속에서 자리를 마련하려 했다. 하지만 허준이 선택한 의술은 단지 출세의 수단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는 유의(儒醫)였던 유의태의 문하에서 의술을 배우고, 약재와 병리학, 침구술을 공부하며 백성들의 병을 직접 돌봤다. “환자를 보지 않고서는 의서를 쓸 수 없다”는 철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의 처방전은 곧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서 길어 올린 기록이며, 『동의보감』은 단순한 약방문이 아닌 삶의 풍경을 담은 책이었다.
2. 처방전 하나에 담긴 생사의 갈림길 – 흉풍과 허준의 응급 치료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허준은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피난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수도 없는 백성들이 굶주림과 병에 시달렸고, 특히 ‘흉풍(胸風)’이라 불린 급성 호흡기 질환이 유행했다.
허준은 당시 호흡 곤란을 호소하던 병자에게 ‘방풍통성산(防風通聖散)’ 계열의 변형 처방을 가했다. 기존보다 마황(麻黃) 함량을 줄이고 감초(甘草)와 행인(杏仁)을 첨가하여 기도를 부드럽게 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보면 꽤 과감한 시도였으며, “대체 이런 약재 배합을 누가 지어냈느냐”는 질문에 허준은 “환자의 기운은 곧 처방의 기준이 되며, 약은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의방촬요』에 실려 있다.
그 처방을 받은 병자는 사흘 만에 숨을 제대로 쉴 수 있게 되었고, 후일 가족이 그 약장을 유품으로 보관하며 “그때 목숨을 건졌다”고 전했다는 이야기도 구전된다.
3. 궁중의 여의가 되어 남긴 처방 – 인목대비의 불면증과 침향원
그는 중년 이후 궁중 내의로 발탁되었고, 선조의 후궁이나 대비들의 건강을 살피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중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인목대비의 불면증 치료다.
인목대비는 광해군 시절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심한 불안과 불면에 시달렸다고 전해지며, 이에 허준은 침향(沈香)을 중심으로 한 복합처방 ‘침향원(沈香元)’을 제작했다.
침향원은 단순한 진정제가 아니라, 허준이 직접 연구하여 여성의 기혈 순환과 정신 안정에 도움을 주도록 재구성한 ‘기방(奇方)’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전통 한의원에서는 허준의 침향원 레시피를 재현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의 약이 곧 몸의 약’이라는 실학적 사고의 산물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인목대비는 그를 “약을 쓰는 손에 온기가 있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한다.
4. 왕의 약을 거부한 사관의 양심 – 홍역 처방과 윤리의 선택
『동의보감』 외편에는 홍역(麻疹)에 대한 상당히 구체적인 설명이 등장한다. 이는 실제로 그가 선조의 차남 영창대군의 열병 치료를 맡으며 작성한 처방 기록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창대군은 고열과 발진 증세를 보이며 상태가 위중했다. 조정에서는 인삼과 녹용, 사향 등 고가의 약재를 넣은 ‘궁중삼보탕’ 투약을 지시했으나, 허준은 이를 거부하고 “병이 열에 이른즉 열로써 다스리는 법은 반드시 피해야 하며, 사향과 인삼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신 석고(石膏), 지모(知母), 황금(黃芩)을 사용한 ‘청열해독탕’ 계열 처방을 써 영창대군의 열을 내리는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대군은 완쾌되었고, 허준은 자신의 처방을 ‘약방일지’에 꼼꼼히 기록하며 후세에 남겼다.
이 사건은 훗날 의관 윤리와 관련된 사례로 전해지며, 왕의 명이라도 의학적 판단을 거스르지 않는 ‘직업적 신념’의 상징으로 남았다.
5. 『동의보감』을 마무리하며 남긴 마지막 처방 – 노쇠와 삶의 마무리
그는 생애 말년, 『동의보감』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신의 건강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자주 복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약이 있다. 바로 ‘보중익기탕(補中益氣湯)’의 개량형, 즉 노쇠한 몸의 중심을 북돋아주는 처방이다.
이 처방은 원래 그가 ‘평민 노인의 허약 체질을 위한 약’으로 고안한 것이었으나, 그는 말년 스스로에게도 이를 응용했다.
- 인삼 대신 당귀와 백출을 강화
- 황기를 줄이고 진피(陳皮)를 더해 소화 부담을 덜어냄
- 자양보다는 기력 유지와 맥의 순환에 집중한 설계
그는 이 처방을 복용하며 끝까지 『동의보감』의 교정 작업을 이어갔고, 책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붓을 내려놓았다. 그 마지막 약장을 정리하면서 그는 “약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6. 결론: 처방전은 기술이 아니라, 삶의 온기다
허준은 기록자이자 치료자였다. 그의 처방전 하나하나에는 단지 약재의 조합만이 아니라, 그 약을 받았던 환자의 이름과 얼굴, 고통의 기억과 회복의 기쁨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가 남긴 기록은 과학일 수도, 의학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을 위한 기술이었다. 한 장의 처방전이 병자를 살릴 수도, 한 마디의 침향이 누군가의 마음을 평온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날 의약은 진보했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런 따뜻한 의사의 마음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허준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기술자가 아닌 위로자였으며, 처방이 아닌 마음을 건넸던 사람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써 내려간 붓끝에는 약재의 이름보다 더 먼저 사람의 이름이 있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