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전염병 유행과 방역 대책, 조선판 ‘팬데믹’

조선 후기 전염병 유행과 방역 대책, 조선판 ‘팬데믹’을 주제로 이야기 해보자. 21세기 인류는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팬데믹을 겪으며 감염병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국가와 세계 전체를 흔드는 재난임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러나 전염병은 현대 사회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사람들은 ‘역병(疫病)’이라는 이름으로 전염병의 공포 속에 살아야 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수차례의 대규모 유행병이 발생했고, 이는 백성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국가 체계마저 흔드는 ‘조선판 팬데믹’으로 작용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유행한 대표적인 전염병들-천연두, 홍역, 장티푸스, 콜레라 등을 중심으로 전염병의 발생 양상과 전파 경로, 사회적 반응, 방역 대책을 분석한다. 또한 그 속에서 국가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백성들은 어떤 믿음과 방식으로 전염병에 맞섰는지를 고찰하면서, 조선판 팬데믹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무엇인지 되새겨본다.

전염병

1. 주요 전염병들

1) 천연두(마마, 손님병)

천연두는 조선 시대 가장 악명 높은 전염병이었다. 조선의 문헌에서는 이를 ‘손님’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생명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얼굴과 몸에 흉터를 남기며 평생 후유증을 안겨주는 병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 『동의보감』에는 천연두를 ‘화독(火毒)이 내부에서 발현되는 열병’으로 설명
  • 특히 어린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았으며, 이는 조선 사회의 인구 구성과 가족 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서 들어온 우두법(種痘法, 종두법)이 일부 지역에서 시도되기도 했으나, 널리 퍼지지는 못했다.

2) 홍역(麻疹)

홍역은 전염성이 매우 높고, 집단 거주지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중 영조 16년(1740)에는 한양에서 홍역이 대유행하여 수천 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어린아이와 노약자가 특히 취약하며, 식량난이나 흉년과 겹칠 경우 사망률이 급증했다.

3) 콜레라(霍亂)

콜레라는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병으로, 개항 이후 외국 선박을 통해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 갑오년(1894)과 을미년(1895)에는 한양과 주요 항구 도시에서 수천 명의 사망자가 발생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이틀 만에 사람 뱃속이 비고, 물처럼 설사하여 맥이 끊기니 살아 돌아오는 자가 없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 민간에서는 이를 “물 마신 귀신이 장난친다”고 해석하며 주술적 방법에 의존하기도 했다.

4) 장티푸스·이질 등 수인성 질병

위생 개념이 부족하던 시대, 장마철이나 여름철에는 물을 통해 감염되는 병이 확산되었다. 주로 우물이나 공동 수도, 하천 주변 마을에서 발생률이 높았으며, 여름에 특히 많은 사망자를 냈다.

2. 사회적 파장과 민중의 반응

1) 감염자와 가족의 고립

전염병이 발생하면 가족 단위 격리가 이뤄졌으나, 국가 주도라기보다는 자발적인 격리 형태였다. 감염자 가족은 마을에서 추방되거나, 집 앞에 표식을 붙여 타인의 접근을 막았다.

  • 《열하일기》에 따르면, “천연두가 돌면 마을 전체가 집 문을 닫고 숨을 죽인다”고 기록돼 있다.
  • 감염자 가족은 묘지 근처에 천막을 치고 치료를 하거나, 아예 죽을 때까지 버려지기도 했다.

2) 불신과 혐오, 희생양 찾기

질병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대, 사람들은 외부인이나 이주민, 무속인, 심지어는 특정 계층을 ‘병을 옮기는 자’로 몰아세우는 일도 흔했다.

  • 기록에 따르면, 일부 마을에서는 귀신을 쫓기 위해 아이를 산 채로 묻는 미신적 풍습까지 행해졌다고 전해진다.
  • 전염병이 돌면 부적, 제사, 굿, 방울을 매단 지팡이 등을 사용하며 병마를 쫓으려 했고, 이는 무속과 주술의 확산으로 이어졌다.

3) 경제적 붕괴와 생계 파탄

  • 병이 돌면 농사에 손이 가지 않아 식량 생산량이 급감했다.
  • 가족 구성원이 죽거나 격리되면 노동력이 부족해져 집단 아사 사태가 발생했다.
  • 장터와 물류가 마비되어 물가가 폭등했고, 쌀 한 되 값이 열 배로 뛰었다는 기록도 있다.

3. 방역 정책과 제도적 대응

1) 국가의 인식과 초기 대응

조선은 이 병들을 ‘역(疫)’이라 하며, 그것을 하늘의 노여움, 풍수의 불길함, 사회 도덕의 붕괴로 인한 재앙으로 해석했다.

  • 왕은 전염병이 확산되면 사직(社稷)에 제를 올리고, 특별한 기우제와 병제(病祭)를 주관했다.
  • 도성 출입을 통제하고 관청 업무를 축소, 심지어는 임금이 거처를 옮기기도 했다.

2) 격리와 차단: 조선식 사회적 거리두기

  • 『승정원일기』에는 전염병 발생 지역을 아예 ‘폐쇄된 지역’으로 지정하고 통행을 금지한 기록이 있다.
  • 환자 격리소를 설치하거나, 일정 구역의 주민을 이주시키는 방식이 시행됐다.
  • 『실록』에는 감염 의심자가 나온 집에 ‘황토를 쌓고, 초가집을 불태워 소독’하는 처방도 등장한다.

3) 진료와 의약품 공급

  • 국가에서 의녀와 의관을 보내 진료를 실시했으며, 한약재와 약탕기를 배급하기도 했다.
  • 하지만 약재 부족과 의료 인력의 부족으로 주요 도시 외 지역은 실질적 방역이 어려웠다.

특히 지방에서는 『동의보감』을 기준으로 한 민간 치료가 대부분이었고, 약재가 귀한 경우에는 뿌리, 껍질, 동물의 내장을 활용한 처방이 널리 쓰였다.

4) 장례와 화장 지침

감염병 사망자는 매장하지 않고 급히 뒷산에 얕게 묻거나, 시신을 소각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매장을 선호했지만, 사망자는 예외적으로 화장이 허용되었다.

4. 정치·사회 변화

1) 민란과 저항

  • 병으로 인해 생계가 막힌 백성들은 관청과 지주를 상대로 약탈을 감행하거나 세금 납부를 거부했다.
  • 홍역 유행 직후인 헌종 10년(1844)에는 경기·충청 일대에서 농민 봉기가 다수 발생, 이들은 역병에 무능한 정부를 비판했다.

2) 지방 자치와 향약의 역할

  • 향약(鄕約)은 지역 사회의 자치기구였으며, 역병 예방과 방역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 일부 마을에서는 ‘향역계’라는 조직을 만들어 약재를 공동 구입하고, 병자 가정을 돌보는 활동을 펼쳤다.

이는 중앙정부의 방역 한계를 보완하는 자발적인 커뮤니티 대응 방식이었다.

5. 결론: 그 역사적 울림과 오늘의 교훈

조선의 전염병 유행은 단순한 보건 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 질서, 정치 체계, 문화와 신앙, 공동체의 작동 방식까지 통째로 시험대에 올리는 거대한 재난이었다.

국가는 왕명을 내리고, 제사를 올리고, 의관을 파견했지만 대다수 백성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민간의 자발적인 방역, 가족을 지키기 위한 어머니의 약초 뜯기, 동네 사람들의 식량 나눔은 조선의 팬데믹을 견뎌내게 한 힘이었다.

전염병은 인간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를 먼저 무너뜨린다. 조선 시대 그것은 노비였고, 여성과 어린이였고, 외곽 마을 사람들이었다. 현대에도 취약계층이 먼저 고통받는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역병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
조선의 기록을 들춰보는 이유는 단순한 과거 회고가 아니다. 그 안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지혜와 경계, 그리고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 찾기 위해서다.
조선의 팬데믹은 끝났지만, 그 울림은 지금도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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