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 최후의 급제자는 누구였을까?

조선이라는 왕조는 말 그대로 유교의 나라였다. 유교 이념은 국가의 뼈대를 이루었고, 관료제의 운용 방식과 민중의 가치관에 깊이 스며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과거 시험(科擧)’이 있었다. 과거는 단순한 시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분을 바꾸는 유일한 기회이자, 가문의 운명을 거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조선 초부터 말기까지, 500년 넘게 이어진 과거제는 무수한 문인들을 배출해냈고, 그들 중 일부는 역사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개화의 물결 속에서 점차 구시대적 제도를 정리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과거제도의 폐지였다.

그렇다면, 조선 역사상 마지막 과거 시험은 언제 치러졌으며, 그 마지막 급제자는 누구였을까? 단지 이름 하나를 찾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험이 가지는 상징성과 시대적 배경, 그리고 마지막 급제자의 삶을 함께 살펴보며 붓의 시대가 어떻게 막을 내렸는지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과거 시험

1. 과거 시험, 조선의 엘리트 양성 시스템

1) 과거의 구조와 종류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며, 이 가운데 문과(文科)가 가장 권위 있고 주요한 시험이었다.

  • 소과(小科): 생원시와 진사시로 구성되며, 합격자는 ‘생원’, ‘진사’라 불림
  • 대과(大科): 문과 급제시험. 소과 합격자 또는 서생이 응시 가능
  • 초시 – 복시 – 전시로 이어지는 3단계 시험을 통과하면 ‘문과 급제자’, 즉 진사에서 진정한 선비, 사대부로의 입문이 가능했다

2) 과거의 사회적 의미

과거는 곧 신분 상승의 유일한 사다리였다. 양반이라도 과거를 통과하지 못하면 실질적 권리를 누릴 수 없었고, 중인이나 서얼도 과거에 급제하면 지위 향상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과거의 공정성 문제가 제기되고, 시험 준비에만 몰두하는 학문 풍토가 비판을 받으면서 점차 시대적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2.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은 언제였는가?

1) 고종의 개화 정책과 과거 폐지

19세기 후반, 조선은 개항과 함께 일본과 서구 열강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화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신식 교육 제도의 도입과 공무원 임용 방식의 개편이 논의되었다.

  • 1894년(고종 31년), 갑오경장 1차 개혁을 통해 과거제 폐지가 공포되었다.
  • 1894년 12월 15일, 홍문관, 성균관, 예문관, 승문원의 4기관에서 과거 시험이 최종적으로 중지되었고, 이는 공식적인 ‘과거제 폐지’의 날로 기록된다.

즉, 조선에서 마지막으로 시행된 과거 시험은 1894년 이전, 바로 그해 봄에 치러진 과거가 최후였다.

2) 마지막 과거 시험의 기록

조선왕조실록과 당시 관보에 따르면, 1894년 봄(음력 3월)에 문과 전시가 거행되었고, 이 시험이 공식적인 과거제도 하에서의 마지막 문과 시험이었다. 이후 고종이 내린 칙령에 따라 모든 시험이 폐지되었고, 사람들은 신식 학교와 외국어 교육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3. 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 그는 누구인가?

1) 조선 최후의 문과 급제자 – 박정양(朴定陽)

조선왕조에서 마지막 문과 장원 급제자는 박정양(朴定陽, 1841~1905)이다. 그는 1868년(고종 5년)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했으며, 이후 외교관, 대신, 총리대신 등 다양한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과거 시험 전체의 ‘마지막 급제자’는 장원 급제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선 후기 마지막 과거 전시에 합격한 사람들 중 ‘최종 호명 순서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이 불린 자’가 실질적인 최후의 급제자로 평가된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은 유성준(柳成俊, 1853~1910)이라는 기록이 있다.

  • 유성준은 1894년 마지막 대과 전시에 최하위로 급제
  • 그는 한성부에서 관직을 시작했으나, 이후 대한제국 체제에서 활동했고, 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생존
  • 말년에는 개화 관료이자 교육자, 학자로 활동

따라서 ‘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라는 상징성을 가장 정확하게 지닌 인물은 유성준이라 할 수 있다.

4. 마지막 급제자의 삶, 조선의 그림자와 근대의 빛

유성준의 삶은 한마디로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선 지식인의 전형이다. 과거 시험이라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관직에 진출했지만, 그가 직면한 시대는 구제도의 해체와 신문물의 급류가 교차하는 혼란기였다.

  • 그는 과거에 급제한 직후,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 이후 고종의 근대 개혁 정책에 참여하며, 교육, 법률, 군사 제도의 정비에 관여
  • 신식학교 설립에 힘썼고, 근대 법률 제정 작업에도 참여
  •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며 국권 회복운동에도 뜻을 두었다.

그의 삶은 “붓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마지막 선비의 초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이라는 체제의 상징이자 유산이었던 과거제의 마지막을 장식한 유성준은, 비단 시험의 마지막 주자이기 이전에, 시대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증인이었다.

5. 과거제 폐지가 의미하는 시대의 전환

과거제의 폐지는 단순히 하나의 제도를 없앤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사회 전체가 지탱해오던 가치관, 질서, 권력 승계 방식의 전면적인 붕괴를 뜻했다.

  • 유교 중심의 학문 체계가 실용 과학, 외국어 교육, 근대식 교육으로 대체
  • 신분 사회의 질서가 붕괴되면서 시험이 곧 지배계급의 입장권이 되는 체제는 종언
  • 국가 운영 인재의 선발 기준이 도덕성과 시문(詩文)이 아니라 행정 능력과 기술로 이동

과거제의 폐지는 조선의 몰락이라기보다는, 그 전통을 넘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관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오랜 시험을 위해 인생을 바쳤던 수많은 선비들에게는 한 시대의 무너짐이자 정체성의 붕괴이기도 했다.

6. 결론: 붓을 내려놓은 조선, 새로운 시대를 향해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 그리고 그 최후의 급제자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정신이자 상징이 서서히 막을 내리는 장면이며,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올 수밖에 없었던 필연의 서사이기도 하다.

유성준이라는 인물은 시험의 마지막 합격자였을 뿐 아니라,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까지를 관통한 과도기의 지식인으로서 복합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가 지나온 길은 전통이 무너지는 자리에 어떻게 스스로를 새롭게 세울 수 있을지를 고민한 지성인의 발자취였다.

과거는 끝났지만, 그 정신은 남아 있다.
오늘날의 시험, 선발, 경쟁 구조도 결국 과거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경쟁과 결과는 결국 무엇을 위한 지식인가, 누구를 위한 사회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 시험은 단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소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귀에 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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