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어머니, 김만덕- 돈보다 사람을 선택한 조선의 여성 상인을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일은 흔치 않았다. 특히 상업 활동에 종사하며 높은 명망을 얻은 여성은 더욱 드물었다. 그러나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제주도의 거상(巨商). 오늘날 그녀는 ‘제주의 어머니’, ‘조선의 여성 기업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구휼가’라는 수식어로 기억되지만, 그녀가 살던 시대엔 단지 한 사람의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신분의 벽, 성별의 한계, 험난한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그녀는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그리고, 위기 속에서 모든 재산을 털어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김만덕의 삶은 단지 돈을 모은 이야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위한 삶을 실천한 한 여성의 깊은 연민과 결단에 대한 기록이다.
1. 김만덕은 누구인가?
그녀는(金萬德, 1739?~1812?)은 조선 후기 제주에서 태어난 여성이다. 정확한 생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영조 말기에서 정조 초기에 이르는 시기 제주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양인이었으나, 조부 때부터 제주에 정착한 이주민의 후손이었고, 아버지의 죽음과 가세의 몰락으로 어린 시절부터 고된 삶을 살아야 했다.
청소년기에는 기녀 교육기관인 ‘관기소(官妓所)’에 들어갔지만, 몸을 파는 직업이 아닌 상업을 택하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관기소에서 제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후 양인 신분으로 돌아가 평민의 삶을 살게 된다. 이처럼 스스로 운명을 개척한 이력은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다.
2. 거상으로 성장한 제주 여인
당시 제주도는 외부와의 교류가 극히 제한된 ‘유배의 섬’이자, 생산력이 열악한 고립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김만덕은 육지에서 들어오는 물자 유통과 관련된 해상 운송과 유통망을 장악하며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 육지에서 들어온 곡물, 직물, 약재 등을 사들여 제주 내에 공급
- 남자 상인들이 어려워했던 위험한 항로도 적극 활용
- 자신의 이름으로 ‘만덕상회’에 해당하는 상단(商團)을 조직하여 규모 있는 유통 사업을 벌임
당시 제주도에서 남자도 하기 어려운 상업 활동을 여성이 주도한다는 것은 이례적이었으며, 김만덕의 경영감각과 인간적 신뢰가 뒷받침된 결과였다.
3. 위기 속에서 나타난 진짜 리더십
1795년(정조 19년), 제주도에 극심한 흉년이 닥쳤다. 세 차례 태풍과 가뭄, 바다 조업 실패가 겹치면서, 식량난은 급속도로 퍼졌다.
-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었고,
- 섬 안에는 곡물이 한 톨도 남지 않았으며,
- 쌀 한 되가 수십 냥까지 오를 정도의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벌어졌다.
이때 그녀는 사재를 털어 수천 석의 곡물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것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었다. 자신이 평생 벌어온 자산을 ‘기회’로 삼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데 쓰겠다는 결단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런 그녀의 행위를 공식적으로 보고받았고, 정조는 그녀의 선행을 치하하며 특별히 상경을 허락하고, 그녀의 의로움을 기리는 칭호를 내렸다. 여성으로서, 상인으로서 조정의 인정을 받은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4. 서울로 올라간 제주 여인, 조정에 선 사람
정조의 명에 따라 김만덕은 육지로 나가 한양에 도착한다. 그녀는 임금 앞에서 직접 하례를 받았으며, 조선의 정예 관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그녀에게 “네가 비록 상것이나, 그 행동은 대장부도 부끄러워할 만하다”며 극찬했다.
그녀는 이후에도 궁중 행사와 여성들의 자선활동에 자주 초대받았으며, 일정 지역의 기근 구제 책임을 맡기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그녀는 조선의 여성 중 거의 유일하게 상인이자 자선가, 정치적 명망인으로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 되었다.
5. 남긴 유산
김만덕은 자식도, 남편도 없이 홀로 살았다. 그녀가 남긴 재산은 대부분 기부되었으며, 자신의 집조차 마지막에는 팔아 가난한 이들을 위한 쌀로 바꾸었다고 한다.
오늘날 김만덕의 삶은 다음과 같은 가치로 재조명된다:
- 여성의 자립과 경제 활동의 상징
- 자본의 윤리적 사용에 대한 교훈
- 섬이라는 공간성의 한계를 극복한 도전의 상징
- 위기 속 공동체를 지키는 책임 있는 시민상
제주도에서는 그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김만덕 기념관’, 김만덕 상(賞), 그리고 김만덕 인문학 강좌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김만덕 나눔쌀’ 캠페인도 이어지고 있다.
6. 결론: 돈보다 사람을 선택
그녀는 가난 속에서 태어나, 스스로를 가꾸고, 운명을 바꾸며, 결국 자신의 모든 것을 타인을 위해 썼다. 오늘날 수많은 부자들이 존재하지만, 모두가 존경받지는 않는다. 김만덕이 남긴 것은 돈이 아니라 진심에서 비롯된 나눔이다.
역사는 그녀에게 장원을 내주지는 않았지만, 사람들 가슴 속에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붓 대신 저울을 들고, 명예 대신 밥을 택한 조선의 여인. 김만덕.
그녀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다.
“돈은 쓸 때 빛난다. 가장 귀하게 쓰일 곳은, 가장 배고픈 사람의 식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