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與猶堂)’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호(號)만이 아니다. 정약용은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썼다. 그리고 그 방 안에는 단지 붓과 종이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정약용의 방 안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다운 고요함과 동시에 철저한 실용정신이 녹아든 생활이 담겨 있었다. 그의 글 속에는 종종 가구와 기물, 수납 방식, 공간의 사용법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고, 그것은 단지 살림의 윤곽이 아니라, 정신의 구조이기도 했다.
오늘 이 글에서는 ‘정약용의 집에는 어떤 가구가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의 삶을 품었던 공간을 상상해보고자 한다. 그의 저술, 기록, 유물, 당시 주거 문화, 그리고 남겨진 후손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여유당의 방 하나하나를 조심스레 들여다보는 시도를 해본다.

1. 여유당이라는 공간, 실학의 물리적 터전
정약용은 본래 남양주에서 태어났으나, 강진 유배 시절에 머물던 집 ‘여유당’이 그의 철학과 삶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남아 있다. 여유당은 사대부 가옥 구조를 따랐으나, 전형적인 양반의 대저택은 아니었다.
- 기본 구조: ㄱ자 혹은 ㄷ자형 한옥
- 안채와 사랑채 구분, 손님 응접 공간과 가족 공간의 분리
- 유배지인만큼 소박하고 단출하지만, 내부 공간 활용은 매우 정교
정약용은 그곳을 단순한 피난처가 아닌, 지식 생산과 삶의 철학이 구현된 실험실로 삼았다. 그렇다면 그 방 안, 그 서재 안에는 무엇이 놓여 있었을까?
2. 정약용의 책상: ‘남공정’의 철학과 기능이 담긴 가구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책상, 즉 ‘남공정(南工亭)’이라 불린 작업 공간이다. 정약용은 서재를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이 아니라, 생각을 가꾸고 논리를 구성하며, 때로는 농기구나 수차의 설계를 그리는 실용 공간으로 만들었다.
- 책상 재질: 대개 소나무 혹은 느티나무 계열의 나무, 튼튼하되 과하지 않음
- 책상 구조: 문갑형으로 위에는 종이와 붓을 두고, 아래에는 문서를 수납할 수 있는 서랍이 배치됨
- 종종 ‘경상(經床)’이라고도 불리는 저평형 책상을 사용하여 좌식 생활에 맞게 설계됨
정약용은 저서 『목민심서』나 『흠흠신서』에서도 실용성과 공간 활용에 대한 개념을 강조하며, 자신의 책상과 방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식을 담는 구조”라 정의했다.
3. 책장과 서첩함: 실학자의 기억을 정리하는 구조물
다산은 막대한 양의 문서를 정리하고 분석하며 생활했다. 이에 따라 단순한 책장이 아닌, 문서 분류에 최적화된 가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사주장(四柱欌): 전통적인 네 기둥형 책장으로, 세로칸과 가로칸을 조절할 수 있는 구조
- 문서궤(文書櫃): 종이와 첩을 수납할 수 있는 넓은 서랍 형태의 궤짝
- 책병풍형 가구: 책장을 병풍처럼 접었다 펼 수 있는 형태로, 공간 절약과 이동성을 겸비
정약용의 글 중에는 “서첩을 항아리에 넣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사방에서 바람이 통하게 하여야 한다.”는 문장이 등장하는데, 이는 곧 그의 문서 보관 방식이 단지 저장이 아닌 ‘숨 쉬는 보관’이었음을 보여준다.
4. 좌식 생활과 난방, 가구의 과학적 배치
정약용의 집은 전형적인 온돌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좌식 생활이 주를 이루던 조선 한옥에서 가구는 단지 물건을 두는 용도가 아닌, 인간의 몸과 조화를 이루는 도구였다.
- 반닫이: 위로 열리는 상자형 가구로, 옷가지나 필기구, 약재 등을 수납
- 소반: 다산이 매일 아침 직접 차를 우려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작은 다리가 달린 소반은 일상생활의 중심
- 나무의자(책판의): 다산은 간헐적으로 작은 나무의자를 사용했으며, 장시간 앉은 상태에서도 척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각도를 조정한 형태였다는 후대의 분석도 있다
5. 정약용의 방 안을 밝힌 등잔과 풍경
유배지에서 글을 쓰던 정약용의 밤은 짧지 않았다. 초가집의 어둠 속에서도 그는 등불 하나로 수많은 문장을 채웠다.
- 기름등잔: 기름을 붓고 불을 밝히는 전통 등잔. 대개 바닥이 넓고 안정적인 형태
- 등잔걸이(燈架): 천장이나 기둥에 걸 수 있도록 제작된 목제 걸이
- 풍경(風磬): 바람이 불면 소리 나는 장식품으로, 집중을 위한 ‘소리의 조율’로 사용했다는 설
등잔의 빛은 희미했지만, 그 속에서 정약용은 민초들을 위한 법과 제도를 써 내려갔다. 어둠 속 한 구석에 놓인 그 작은 등잔은 실학이라는 거대한 흐름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6. 정약용의 살림살이는 단순했을까?
정약용은 절제의 미덕을 갖춘 학자였지만, 그의 집에는 절제와 동시에 기능적 아름다움이 함께 존재했다. 그는 단순히 없는 것을 참는 금욕이 아니라, 있되 과하지 않은 실용주의를 실현한 인물이었다.
- 그의 방에는 거울(동경)도 있었고, 한약재를 다리는 작은 화로도 있었다.
- 종이함, 필통, 향합(香盒), 묵죽통(먹과 붓을 두는 통) 등 문방 사물들이 그 삶의 일부였다.
- 아침에는 찻잔을 닦으며 하루를 시작했고, 저녁에는 노트에 사색을 정리하며 하루를 마감했다.
7. 결론: 가구는 철학을 담는 그릇이다
정약용의 집에는 무언가 거창하고 화려한 가구는 없었다. 그러나 그 공간은 놀라우리만치 정돈되고, 효율적이었으며, 생산적 삶을 가능케 하는 구조로 가득 차 있었다. 가구는 단지 나무와 못의 조합이 아니라, 그 사람의 철학, 생활, 감정, 그리고 하루의 호흡을 담는 그릇이었다.
그가 쓰던 책상, 그 위에 놓인 벼루, 곁에 있던 등잔 하나까지도 “사람을 위한 가구”라는 조선 실학의 이상을 품고 있었다. 만약 오늘날 정약용이 살아 있다면, 아마도 그는 조립식 책상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모든 도구는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은 그 도구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