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의 사찰 종소리, 불교 신앙과 조선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고려의 산사는 오늘날에도 굽이진 산중 어딘가에서 고요한 종소리를 울린다. 청아하면서도 깊은 음의 울림은 단순히 시간의 경과를 알리는 신호가 아니다. 그것은 곧 불교의 깨달음을 향한 부름이자, 중생의 고통을 어루만지는 공덕의 파동이며, 왕조의 운명을 함께했던 정신의 상징이었다.
고려는 불교가 나라의 중심 철학이자 통치 원리였던 시대다. 불교는 정치, 예술, 사회, 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깊숙이 스며 있었고, 그 중심에는 사찰과 사찰의 종소리가 있었다. 반면 조선은 유교를 국시로 삼고 불교를 억압한 왕조로, 겉으로 보기엔 불교가 퇴색된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종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고려 시대 사찰 종소리에 담긴 신앙적, 사회적 의미와 함께,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불교의 변화와 그 적응 양상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종소리를 따라가며 우리는 단지 종의 물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울림 속에 담긴 시대정신과 인간의 신앙을 듣게 될 것이다.

1. 고려 시대 불교의 중심, 사찰과 범종의 역할
1) 불교 국교화와 사찰의 위상
918년 고려가 건국되었을 때, 태조 왕건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를 중심 이념으로 삼았다.
- 고려 왕조는 불교를 통해 국가 정통성과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으며,
- 지방 호족과 결속을 강화하고 백성들의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불교 사찰을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 특히 불교는 무속신앙이나 도교와 달리 정교한 교리와 체계, 제도화된 사찰 조직을 갖추고 있어 통치 이념으로 유리했다.
이로 인해 고려 전역에는 수많은 사찰이 세워졌고, 각 사찰의 중심에는 범종(梵鐘), 즉 사찰 종이 설치되었다.
2) 범종의 기능과 상징성
범종은 불교 사찰에서 수행과 예불의 시간, 그리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의식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 새벽 타종은 수도승과 신도들에게 수행의 시작을 알렸다.
- 영혼을 구제하는 기능: 종소리는 중생의 고통을 덜고, 지옥에서 구제받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긴 울림이었다.
- 법의 울림을 상징: ‘범(梵)’은 곧 불법(佛法)을 뜻하며, 범종은 불법의 소리를 온 세상에 전하는 수단이었다.
이처럼 범종은 단순한 악기가 아니라, 신앙과 수행, 예술과 정신의 결합체였다.
2. 고려의 범종 제작과 예술적 특징
1) 고려 범종의 제작 기술
고려 시대에는 불교의 번성과 함께 금속 주조 기술이 극도로 발달하였으며, 범종 제작 역시 정밀하고 예술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 청동이나 유기(쇳물)에 주형을 부어 만들며,
- 종의 몸체에는 비천상, 보살상, 불자문, 사자상 등 다양한 불교 도상이 섬세하게 새겨졌다.
- 종 꼭대기에는 용뉴(龍鈕)라 불리는 용머리 장식이 있어, 하늘과 인간, 법계(法界)를 연결하는 상징으로 기능했다.
2) 대표적인 고려 범종
- 상원사 동종(국보 제36호, 통일신라 말기 제작): 고려 이전부터 사용된 종이지만, 고려에서도 지속적으로 모범이 되었다.
- 영흥 관음사 동종: 장엄한 비천상과 기하학적 문양이 어우러진 대표작.
- 은진미륵사 동종: 거대한 크기와 음의 울림이 뛰어나며, 조선 초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고려의 범종은 단지 기능적 도구가 아닌, 왕조의 미학과 공예 기술이 총망라된 예술 작품이었다.
3. 사찰의 종소리와 백성들의 삶
1) 종소리와 신앙 체험
사찰 종소리는 단지 불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산촌과 강촌, 도심의 백성들까지 그 울림에 귀 기울이며 삶을 돌아보았다.
- 새벽 종소리는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고,
- 저녁 종소리는 하루를 마무리하고 반성하는 시간의 상징이었다.
- 장례식이나 재(齋) 의식 시 종을 울려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특히 고달프고 피폐한 삶 속에서 종소리는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다”는 위로로 작용했다.
2) 종소리와 공동체 의식
- 종소리는 마을 전체에 울려 퍼져 모두가 동일한 시간, 동일한 공간 안에 있다는 의식을 공유하게 했다.
- 이로 인해 종소리는 단지 신앙의 울림을 넘어서, 공동체의 리듬이자 정신적 중심이 되었다.
4. 조선의 변화 속 불교와 종소리의 적응
1) 조선의 유교적 국가 체제와 불교 억압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며, 국교는 유교로 전환되었고 불교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 태조와 태종은 불교를 일정 부분 인정했으나,
- 세종 이후 성리학 강화와 함께 사찰 철폐령, 승려 수 제한, 국가 재정 지원 금지 등 불교 탄압 정책이 시행되었다.
- 사찰은 도시 외곽이나 깊은 산중으로 이전되었으며, 불교는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는 종교로 전락하게 된다.
2) 그럼에도 꺼지지 않은 종소리
하지만 이러한 억압 속에서도 범종의 종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 사찰은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지만, 종교적 기능과 문화적 중심지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 오히려 도심에서 멀어진 사찰은 더 깊이 있는 수행과 종교적 순수성을 유지하게 되었고,
- 종소리는 여전히 마을 사람들에게 시간과 신성의 감각을 제공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불교와 유교, 무속이 복합적으로 융합되며, 범종도 의례와 제사의 요소로 다양하게 기능하게 된다.
5. 현대에서의 계승과 문화적 재발견
1) 문화재로서의 범종
오늘날 고려 시대 범종은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문화유산으로 보호되고 있다.
- 박물관에 전시되거나,
- 복원되어 실제 사찰에서 다시 사용되며,
- 종소리를 녹음하거나 재현하는 콘텐츠로 활용되기도 한다.
이는 단지 역사 유물의 보존이 아니라, 신앙과 예술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2) 범종소리의 현대적 의미
도시의 소음 속에서 잊혀졌던 종소리는 최근 다시금 ‘명상’과 ‘힐링’의 소리로 주목받고 있다.
- 산사 체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에서 종소리는 심신을 정화하는 요소로 활용된다.
- 일부 방송에서는 고려 시대 범종 소리 음파를 재현하여 뇌파 안정 효과를 실험하기도 한다.
범종은 지금도 여전히,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정신적 공명체로 살아 있다.
6. 결론: 천년의 음, 사라지지 않는 울림
고려의 사찰 종소리는 단순한 청동의 진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왕조의 기도였고, 백성의 희망이었으며, 수행자의 고요한 침묵을 깨우는 시작의 소리였다.
조선이라는 시대의 변곡점에서 불교는 억눌렸지만, 종소리는 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은 산사 속에서, 더 간절한 기도 속에서 종은 울렸고,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바쁘고 각박한 일상 속에서, 산사의 종소리는 시간을 잠시 멈추게 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울림이다.
고려의 종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시대를 넘어, 신앙과 문화, 예술과 인간의 마음을 잇는 울림의 선율로 지금도 우리의 삶을 조용히 흔들고 있다.